"거기 누구 있소?"
자그마한 사내가 이렇게 물었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퍽 엉성해보였다.
"누구 있다면 말 좀 하시오."
사내가 초조한 듯 또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적막, 오로지 적막 뿐이었다.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조심스럽게 나무 옆에 내려놓았다. 그 나무는 아주 오래된 나무였다. 전설 또한 지니고 있는 나무였는데, 그 전설에 따르면 나무의 나이는 무려 1500살이라고 한다. 사내는 나무의 결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주 차가웠다.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사내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동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난 자유의 몸이다!"
사내는 화들짝 놀라 동굴을 쳐다보았다. 그 깊은 곳, 그 깊은 곳 너머에서 광기로 가득 찬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왔다.
"아무도 날 막을 순 없어! 이제 난 자유라구, 자유!"
사내는 이제 공포에 질렸다. 어둡고 축축한 진흙 같은 공포가 사내의 정신 속에 파고 들었다.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빗자루를 다시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빗자루로 몸을 가렸다. 의문의 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맙소사! 장장 50년간 옥살이를 했어. 하지만 이제 난 자유야. 어린 소년이었던 내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나왔다구! 나처럼 위대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사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찌됐건 지금은 출소한 몸인 듯 했다. 그런데 그 괴기스러운 목소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나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거야, 암, 모르고 말구. 난 탈옥에 성공했으니까. 탈옥했으니까! 오, 그곳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왜냐하면 오직 나 혼자만이 그 감옥에 있었으니까! 오, 드래곤들! 드래곤들은 아주 탐욕스러워. 오로지 먹는 것밖에 모르지. 그들은 사람 고기를 좋아해. 나도 거의 잡아먹힐 뻔 했거든. 그래서 아주 잘 알고 있지. 드래곤들은 온갖 방법으로 사람 고기를 먹어. 잘근잘근 씹어먹기도 하고, 보글보글 끓여먹기도 해. 오, 그 얼마나 끔찍한가! 하지만 난 살았지. 그게 전부야. 난 살았다는 것."
사내는 더욱 공포에 질렸다. 공포는 사람을 무의식 속에서 잠들게 한다. 사내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동굴 속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유의 몸이라는 말만 몇 번 더 되풀이했다. 그 목소리가 사라진 후, 빗자루를 든 사내는 조용히 다시 길을 쓸기 시작했다.
"하벤, 하벤!"
나이 지긋한 여자가 폭이 넓은 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마구 달려왔다. 그녀는 하벤의 오랜 친구이자 유모인 메케나였다.
"하벤!"
메케나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하벤은 또 어딜 갔담? 분명 그 망할 숲에 있겠지! 망할 숲, 망할 숲!
메케나의 생각대로 하벤은 숲에 있었다. 하벤은 숲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숲'에는 더욱이 신비로운 기운이 있었다.
하벤은 12살 남자 아이였다. 그는 깡마른 몸과는 다르게 오동통한 두 볼, 그리고 놀랍도록 눈이 부신 회색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벤은 잘생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충분히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오, 하벤." 메케나가 중얼거렸다. "하벤 이켈리아."
그제서야 하벤은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천진난만하게 메케나를 불렀다.
"메케나! 나 여기 있어요! 이 숲에 있다구요!"
그러더니 메케나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쫑알쫑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오, 메케나. 이 숲은 정말 멋진 곳이에요. 마치 정령들이 숲 속을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요. 숲의 정령들 말이에요!"
"숲의 정령들은 모두 전설에 불과해. 하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오늘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오시잖니."
"아, 맞아요. 중요한 손님이 오시죠. 하지만 전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는 것 밖에 몰라요. 그 중요한 손님이라는 분이 대체 누구죠?"
"하벤, 더 이상의 질문은 안 돼. 그리고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란다."
메케나가 조신한 척을 하며 말했다.
"하벤, 세상에, 어딜 갔다 온 거니?"
하벤의 어머니인 이켈리아 부인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녀는 아들의 바짓단이 온통 진흙투성이인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숲에 갔다 왔어요."
하벤이 조금 뾰로통해져서 대답했다.
"숲에 갔다 왔다구? 세상에, 또 왜 그런 거니? 앞으로는 절대... 메케나, 괜찮아요?"
이켈리아 부인이 메케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메케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하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마님. 전 그냥... 오, 말하지 않을래요."
이켈리아 부인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벤은 영문을 몰라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이었다.
"자, 곧 손님이 오실 거에요. 그러니까 하벤, 넌 옷 좀 갈아입자. 메케나, 옷을 들고 따라와요."
메케나는 하벤의 옷방에서 옷을 찾아 이켈리아 부인과 하벤을 따라갔다. 하벤은 어느새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켈리아 부인은 메케나가 가져온 옷을 가지고 하벤과 단 둘이 그 방에 들어갔다. 메케나는 눈물을 훔치며 응접실로 향했다.
"엄마, 왜 메케나는 안 와? 그리고 여긴 뭐야?"
하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그러자 이켈리아 부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벤, 잘 들어. 곧 손님이 오실 거고, 넌 반드시 바르게 행동해야만 해. 인사 똑바로 하고, 예의를 차려."
"왜?" 하벤이 순진무구하게 되물었다.
"그래야만 하니까!"
이켈리아 부인은 그렇게 한 번 고함을 치고, 하벤의 옷을 갈아입힌 후 다시 응접실로 갔다.
하벤은 이 모든 게 이상하기만 했다. 어째서 엄마와 메케나가 저렇게 행동하는 걸까? 갑자기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켈리아 저택의 응접실은 나름대로 호화로운 편에 속했다. 깔끔한 대리석 바닥은 반짝거렸고, 벽에는 금박으로 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테이블은 하나뿐이었지만 정교하고 튼튼했다. 책장 속에는 수많은 책들이 꽂혀져 있었다. 하벤은 언젠간 어른이 되어서 저 책들을 다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시계는 계속 똑딱거렸다. 하벤은 잔뜩 긴장하여 두 다리를 딱 붙이고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손님이 온 것이다.
사람들이 잠긴 목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도련님을 보낼 생각이신가?"
"그런 것 같아."
응접실 문이 열렸다. 곧이어 손님이 나타났다. 하벤은 커다란 두 눈으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손님은 백발니 성성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정작 얼굴은 그렇게 나이가 든 것 같지 않았는데, 한 예순다섯 정도로 보였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하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더욱 활짝 웃으며 이렇게 인사했다.
"네가 하벤이로구나? 만나서 반갑구나, 하벤. 하벤 이켈리아, 맞지? 난 베스모란다. 베스모 사립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지."
하벤은 어머니가 지시한대로 행동했다.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사립 학교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이제부터 넌 내 학생이란다, 하벤. 지금 나와 함께 학교로 갈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공부를 할 거란다."
하벤은 당혹감에 어머니와 유모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설명을 좀 해달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유모는 하벤의 눈길을 피하기만 했다. 하벤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런, 하벤. 우는 거니? 그러면 안 되지. 진정한 사내는 울지 않는거란다. 그러니 그만 그치렴."
자신을 베스모라고 소개한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에 하벤은 눈물을 그치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마차는 준비되었습니다, 어머님. 이제 바로 출발하기만 하면 됩니다."
베스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켈리아 부인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하벤을 끌고 대문으로 나갔다.
"잠깐만, 엄마! 난 아직 갈 준비가 안 됐어!"
하벤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켈리아 부인은 말없이 아들을 마구 끌고 갈 뿐이었다. 하인들은 옆에서 거들지 않았다. 그들은 어머니가 아들을 냉혹하게 키우도록 놔두었다.
"엄마, 엄마!"
마차에 올라탄 하벤이 절규했다. 마부가 기합을 넣었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그로써 한 명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자유의 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매주 월수금 연재됩니다.
ⓒ 최지은. 2020